언라이트의 캐릭터, 마도 로젠부르그의 탐정 브라우닝이 사랑받는 합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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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기적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그래. 기적이 아닌, 기적 '같은'일이다. 기적과 너무나도 비슷해 흔히들 착각하곤 한다만. 0.999999… 아, 너무 길구만. 어찌 됐건 저 앞의 어마 무지하게 긴 9의 나열이 결코 1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야기가 조금 샌 기분이다만, 기적 같은 일은 행운이란 이름으로. 아니. 조금 다르긴 하겠다만 여하튼 그러한 이름으로 다가오곤 한다. 예를 들어 무더운 여름날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었건만 스틱에 하나 더! 라던지. 그런 식으로 기적 같은 일은 자주 일어나곤 한다. 기적과는 달리 말이다.
…그렇지만 저런 좋은 일로만 기적인 척하면 좋으련만.
기적 같은 일은 정말로 기적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래, 자신을 궁지로 몰 나락의 목구멍조차도 그리 착각하게 만드는 게 그것이니까. 그리고. 멍청하게도 나는 그 둘을 착각하고 말았으니.
비명이 들렸다. 식은땀이 등 뒤로 주륵 흘렀다. 눈에는 안대를. 입에는 재갈을. 양손은 등 뒤로 꽁꽁 싸매진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청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건만. 찢어질 듯 울리는. 정확히는 돼지 멱따는 소리와 비슷한 ― 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다만. ― 비명은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비명 하나에 몸 한 번 움찔. 또다시 들려온 소리에 또 한 번 움찔. 동시에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다. 일단은 나도 사내건만. 앞은 안 보여. 입은 틀어막혀 웁읍 대고 있고. 양팔은 묶여선 완전히 무력한 상탠데. 지척에서 들려오는 비명이라니! 무섭기 그지 않은가! 그리해 내가 파들파들 떨고 있을 때. 언제부턴가 비명이 멎고, 청각에 밀려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자유로운 감각의 기관인 코가 비릿한 피 냄새를 잡아내자. 코앞에서 또각이는 구두 소리가 요란했다.
또각. 또각. 또각.
점점 다가오는 소리에, 몸은 절로 굳고. 강제로 틀어막혀진 입술 사이론 앓는 소리가. 눈이 가려져 있건만 손이 다가오는 인기척에 묶인 몸으로 바동대면. 스르륵, 하고 재갈이 풀리고. 곧이어 양팔을 단단히 묶고 있던 밧줄이 풀렸다. 어안이 벙벙해 가만히 있다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안대를 향해 손을 뻗으면,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퍼졌다. 어허, 안되지. 안대는 벗지 않는 게 좋을걸.
"일부러 씌워두고 있다곤 생각 안 하나?"
죽는구나. 이걸 벗으면 죽겠구나.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린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좋아.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이제 여기서 어찌 빠져나가면 좋을꼬. 평범한 민간인입니다? 그런 허울 좋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인물은 아니다. 직감이 그리 외쳤다. 아이고. 산 넘어 산이라더니.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아, 정말 어쩌지?
"이런 곳에 양손이 묶여, 엄중히 감시되고 있었다…라."
"…아, 저. 그게…"
"딱 봐도 일반인은 아니군. 그렇지?"
선수를 뺏겼다. 일단 지르고 볼 걸 그랬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평범한 탐정입니다만."
"평범한 탐정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는데?"
정곡을 찔렸다. 하하, 애써 웃었다.
"…어쩌다… 의뢰를… 잘못 받아서…"
"이런, 그거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래?"
안타까운 일이면 그냥 보내주지 그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으니, 뜻밖의 말이 들렸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너는 모른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말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잘 모르겠다만? 능청스럽군. 웃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그 말에 이어 나는 손목을 틀어 잡히고, 그대로 이끌려가다-.
정신을 잃었다.
…그러고 나서 눈을 뜨니, 사무실 앞이었더라….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상황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택배 왔습니다. 란 말에 낚여 문을 여니 이 꼴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지가 묶이지 않은 것일까. 나는 천인지 안댄지 모를 것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안대에는 손을 안 대는 게 좋을걸?"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자 이전의 그 웃는 소리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 내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하, 하하. 잔뜩 굳은 웃음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 혹 이전의 그인가? 그리 묻자 긍정하는 답이 돌아왔다. 기가 찼다. 아니, 그냥 보내준 건 고맙다만. 이건 아니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곤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모조리 긁어모아 물었다.
"진짜 자네 누군가?"
"말했잖나? 나를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대낮에 이렇게 사람을 납치하고…! 이건 명실상부한!"
"범죄라고?"
말문이 막혔다. 아, 맞다. 눈이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내 앞에 있을 저 사내는 어엿한 범법자였지. 두통이 밀려왔다. 아 젠장. 젠장! 의뢰 하나 잘못 받아가지고,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잔뜩 울상을 짓고 있자니, 인기척과 함께 말이 들려왔다.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데.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쪽은 몰라도 나는 그쪽 얼굴도 모르는데. 정중히 사양할…"
"사양하면 섭섭하지. 일부러 준비한 건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눈을 가린 안대를 벗겨 내려 손을 뻗은 순간, 무언가 끌려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강제로 벌려진 입안으로 무언가 밀어 넣어졌다. 아, 아닐 거야. 설마 아닐 거야아아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는데. 달콤한 맛이 돌았다. 잔뜩 굳어있던 것을 알아챈 걸까. 사내가 웃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컸다.
"눈을 가린 채로 만찬을 즐기긴 어렵지. 그래. 내 나름대로 배려였다만. 혹시, 필요 없었나?"
필요 없어….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랐다만, 입안 가득한 고기를 우걱우적 씹어 삼키며 그 말 또한 같이 삼켰다. 애써 입을 열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꾸역꾸역 밀어 넣는 고기를 덥석덥석 삼키니 아마도 바로 앞에 있을 상대가 투덜거렸다. 겁도 없이 잘도 받아먹는군.
"자네가 나를 해하려면 이미 하고도 남았을 게 아닌가. 친절하게도 먹여주는데 받아먹지. 그럼 뱉어내길 바라나?"
"재미없군. 좀 더 떠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말이야."
"…변태가 따로 없군 그래. 아, 이미 글러 먹었나?"
"하하, 정말 겁이 없군…."
순간 빛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실눈을 뜨고 있다 크게 눈을 뜨니. 오 세상에. 절로 탄식이 튀어나왔다. 눈앞의 사내는,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프라임 원의 언더보스…."
"재밌네. 그 용기. 높게 사주도록 하지."
눈앞의 사내가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도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프라임 원의 언더보스. 이와 엮인 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라는 뒷골목의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숨소리마저도 시끄럽게 느껴지는 적막한 밀실 안에서, 그는 화병 밑에 가려져 있던 굳은 자국을 발견했다. 이야말로 범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위로 손을 올리는 찰나, 녹슨 경첩이 맞물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문이 열렸다.
"발견해 버리셨군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비죽 웃고 있는 얼굴은 바로-
* * *
브라우닝은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서 떨어졌다. 잘못 꺾인 듯 따끔따끔 아픈 허리를 짚자 절로 아이고 소리가 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의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그간의 전개를 떠올리자 다시 한 번 아득한 기분이 들어서 읽던 추리소설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것을 흰 장갑을 낀 손이 주워들었다.
"괜찮으세요, 브라우닝 씨?"
입을 열었지만 차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허리를 짚은 채 눈물을 글썽이는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재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역시 가엾은 엘비스가 진범이라는 데 대한 충격이 크신 거죠? 당신은 좋으신 분이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어요. 쫓기는 저를 걱정하고 도와주셨잖아요."
갑작스런 찬사에 얼굴을 들자 브라우는 고개를 홱 돌려 아까까지 브라우닝이 앉아 있던 원목 의자를 만지작거렸다. 풀잎 빛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귀 끝이 조금 붉은 것 같기도 하고. 오토마타에게도 그런 기능이 있나? 착각이겠지, 생각을 하는 브라우닝의 쪽을 브라우가 다시 돌아보았다. 부끄러운 생각을 하던 머릿속을 들킨 듯한 기분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브라우는 평이한 어투로 사무적인 내용만을 말할 뿐이었다.
"이런, 의자에 금이 갔네요. 제가 일단 수리해 볼 테지만 당분간 여기 앉을 때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의자 위로 몸을 굽히는 브라우의 모습 위로 그를 처음 봤던 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눈앞에서 검은 피를 앞섶에 흠뻑 젖은 채로 웅크리고 있던 모습, 일단 병원부터 가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던 모습. 그리고 곧 총을 맞아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있던 가는 팔과 가는 허리.
"잠깐, 내가 옮기…"
"네?"
가슴까지 번쩍 올린 의자를 보고 브라우닝은 그만 머쓱하게 팔을 내렸다.
"아니네, 아무것도."
상대는 오토마타다. 사람이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 낸, 무한의 기동력을 가진 기계. 그런데 왜 자꾸 여러모로 착각하게 되는지, 아무래도 눈앞에서 힘없이 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 가는 사지가 각인이 된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모습이 바로 브라우닝 자신이 지금의 여정을 시작한 계기이며, 어콜라이트라는 집단과 함께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토마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날 밤 꿈에서 브라우닝은 밀실 안에 있었다. 낡은 경첩이 끼익- 하고 마찰하면서 문이 열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브라우닝은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여리고 작은 청년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려낸 것처럼 상냥한 웃음을 말끔한 얼굴에 띠고서. 만들어질 때부터 내장된 기능임에 틀림이 없는 그 미소가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슬퍼, 브라우닝은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곧 꿈에 대해 잊어버렸다.
* * *
스스로를 '어콜라이트'라 지칭하는 의문의 남자들, 아니 오토마타 몇 구와 사립탐정 브라우닝이 기거하는 오두막은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숲 속에 있었다. 남향으로 높이 낸 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은 델 듯이 뜨거웠다. 사람의 살결을 바짝바짝 말려 가는 태양 빛 속에 브라우닝이 건조한 책장을 팔랑팔랑 넘겨 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한참을 지속되던 소리는 이내 멎고,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루하군."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청아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마도 로젠부르그 시리즈는 아직 다 안 읽지 않으셨나요, 브라우닝 씨?"
그리고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읽고 안 읽고의 문제가 아니네. 아무리 소설을 읽는 것이 내 취미라지만, 며칠 내리 책만 읽고 있기는 적적하지 않겠나."
여전히 그려낸 것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는 브라우의 얼굴이 지금은 갑갑하고 불편했다.
"이보게. 나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같은 일상에 지쳐서 자네들을 따라 나섰다네. 그런데 아무리 추적이 있다지만 이렇게 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책만 읽고 있어서야 전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어."
이렇게 말을 하면 과연 저 웃음이 가실까.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죄어 오는 두려움에 시선이 떨렸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 저와 함께 티타임이라도 가지시겠어요?"
* * *
오두막은 깊은 숲 안에 있었기에, 따스한 봄볕 아래 간혹 새 지저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 왔다. 입술에 닿는 수온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따스했고, 엄선된 차향은 향기로웠으며, 청년은 상냥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시종이었다. '어콜라이트'라는 호칭을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홀로 읽는 추리소설은 금세 물리고 말았지만, 둘이 함께 소설의 전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새로운 기쁨으로 브라우닝을 즐겁게 했다. 그는 다시 책이 읽고 싶었다. 다시금 이 생활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궁금증도 생겼다.
"브라우. 자네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따끔거렸다.
"나는 아까 불평을 했네만, 자네는 자신의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않아. 이렇게 내내 집안에서 지내는 것, 자네는 견딜 만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브라우는 바로 대답이 없었다. 역시 괜한 질문을 한 게야. 이 소년은 오토마타다. 완전하게 만들어진 시종이야.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지.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브라우닝 씨, 저는…"
소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바깥에 나가서 정보를 알아보고 있는 루드도, 자금을 모아 오는 메렌도, 추적을 교란시키는 비레아도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합니다.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서로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남자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어났다.
"당신이 있지요. 당신은 우리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분노하고 거리낌 없이 도와주겠다고 한 최초의 사람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서로에게 각별하다고 해도 브라우닝 씨, 당신만큼 특별한 사람은 또 없어요. 그러니 당신의 시중을 들고 늘 곁에서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게 있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불만이 있을 턱이 없지요."
이러한 표정을 단순히 제조된 웃음이라 치부했던 브라우닝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리고… 드디어 제 이름을 불러주셨네요. 기뻐요, 브라우닝."
소년이 수줍은 것인지, 그 말을 듣는 브라우닝 자신이 수줍은 것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 * *
그날 밤도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이전과 같은 밀실 속, 청년의 웃음이 숨이 멎을 만큼 해사했다. 웃으며 다가오는 브라우의 뒤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청년은 브라우닝을 밀쳐 쓰러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타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가슴이 쓰림을 느끼며 눈을 뜬 브라우닝은 이제야 그간의 꿈들을 기억해냈다. 어제 들었던 의문도 함께 기억해냈다.
어째서 브라우는 그 모든 추리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심지어 브라우닝이 어느 부분을 읽고 있었는지도.
온갖 행동에서 이유를 찾는 것은 직업병이야. 안 좋은 습관이다. 그리 되뇌어도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한동안 둘만의 티타임은 계속되었다.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정말로 온 정성을 다했다. 달달한 디저트를 만들고, 의견을 묻고, 책 위에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을 법한 간식으로 메뉴를 바꾸고, 미리 따뜻하게 데워둔 찻잔에 갓 볶은 찻잎을 우려내어 차를 마시는 브라우닝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확인하고, 기쁘게 웃었다. 시간은 온갖 은은하고 싱그러운 차향과 뒤죽박죽이 되어 꿈결처럼 달콤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어콜라이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취합하여 추적자들의 계획을 예상하고, 그에 맞설 대책을 세우고, 종내에는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그것이 브라우닝의 역할이며, 그 목적을 위해서 브라우가 보통의 인간인 브라우닝이 습격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그를 옆에서 지키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차향이라는 것이 은은한 줄만 알았더니 달게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들이 태반인 것 같았다. 또렷하게 전략을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이리 힘든지, 무에 그리 탐정의 명민한 머리를 취하게 하는지. 멍하니 브라우가 따르는 잔을 받아들던 브라우닝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잔을 내려놓았다. 청년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전에 루드가 말했던 일 있잖은가. 갑자기 노파가 팔을 덥썩 잡았다던…"
하지만 브라우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놓인 찻잔에 꽂혀 있었고, 전에는 늘 비슷해 보였던 얼굴이지만 그것이 풀죽은 얼굴임을 이제는 아는 터였다. 왜 여전히 그가 지켜주어야 할 여린 청년으로 느껴지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여하튼 브라우에게 사소한 심증으로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의심을 입 밖으론 내면 지금과 같은 평온한 티타임은 끝나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명이 길고 노화가 드문 통기기구의 사람이 주름진 노파일 리가 없다. 합리적인 추리를 하는 것이 탐정 된 자의 도리다. 그리하여 브라우닝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찻물과 함께 망상을 꿀꺽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 * *
억지로 삼킨 의심은 현실이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루드가 붉은 정장의 안쪽에 검은 피를 적시고 나타났을 때에도 브라우닝은 자신이 아직 꿈을 덜 깬 것인가 싶었다. 간혹 악몽처럼 한 청년의 피에 젖은 모습을 자꾸만 꿈에서 보고는 했기에. 그나마 추적을 따돌리는 데 성공해서 그들의 은신처인 이곳만은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맛본 패배에 오두막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도 브라우는 쟁반에 갓 구운 머핀과 윤이 나게 닦은 찻잔을 올려서 들고 온다. 하지만 브라우닝 스스로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미안하네, 브라우."
브라우는 여전히 어서 받으라는 듯이 쟁반을 떠안고 있었지만, 브라우닝은 1인용 원목 의자에서 내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네는 내가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믿어주었지. 하지만 내가 주제에 탐정이라는 이름자를 달고서 이렇게나 어리석었어. 뻔히 보이는 단서를 당장의 평안에 눈이 멀어서 흘려보았지. 이렇게 자네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네."
브라우는 쟁반을 탁 소리가 나게 세게 내려놓았다.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래, 마치 브라우닝에게 처음 케이스를 부탁했던, 브라우닝이 잊지 못해 케이스를 내버리지 못했던 그때와 같은 진지한 눈빛.
"그런 소리 말아요, 브라우닝. 우리에게는 지금 같은 생활을 누리는 것도 굉장한 기적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은인이에요. 처음 노움이 기적을 행해서 우리가 자아를 얻게 되었을 때, 우리가 기뻐했을 것 같나요?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권도 존엄성도 없이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이면서, 우리는 서커스의 웃음거리 주제에 자아를 얻게 된 운명을 매일같이 저주했어요. 특히 저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더.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취미를 들인 거예요.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카드 마술을 하는 메렌은 도박을, 야수조련사인 루드는 야수 우리 옆에 피어난 꽃의 감상을, 단장과 사람들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차를 대접해야 하는 저는 홍차를. 그러니 스스로 원해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하고, 함께 해 주시는 당신이 어찌나 고마운지, 이걸 모르시겠나요?"
하지만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그 말은 위로와는 정반대의 소리로 닿았다. 그는 그만 맥이 풀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비뚜름하게 무너져 내렸다. 허탈함에 웃음만 나왔다.
"하하하…"
"왜… 그러세요, 브라우닝 씨?"
"아니, 그러니까 자네 취미가 홍차였다는 거지. 그래서 같이 즐겨주는 내가 고마웠고."
우물쭈물 어쩔 바를 모르는 브라우에게 브라우닝은 그저 웃어버렸다.
"아니, 자네는 잘못한 것 하나 없네. 그냥 내 자신이 한심해서 그래. 추리소설의 범인 하나 제대로 못 맞추고, 눈앞의 단서는 놓치면서 거기다 착각은 사서 하니 이거 탐정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하지만 브라우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자네는 잘못한 것 없대도-"
"착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직 밀실의 꿈에서 덜 깬 것인가 싶었다.
"다시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전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 차를 따를 수 있어서 행복한 거예요."
브라우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곧이 본다. 맑은 호박색의 눈동자 안에 바보같이 입을 헤 벌린 자신이 보이고, 오토마타든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청년은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두근거리는 가슴에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당황하여 몸을 뒤로 빼던 브라우닝은 그만-
우지끈 소리와 함께 의자가 부서졌다. 이번에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제대로 삐끗했는지 신음만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향하는 청년의 얼굴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그리고 한 주 내내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청년은 침대에 누운 탐정의 시중을 들고, 그가 눈을 빛내며 쟁반에 한가득 담긴 차와 간식거리를 건넬 때마다 탐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이 곤혹스러워 시선을 피하던 것은 꿈이 아님에도 꿈결 같던 시간의 이야기.
동거인이 생겼다. 동거'인'이라기는 애매할지도 몰랐다. 꽃이니까. 하지만 그 '꽃'은 지금 막, 브라우닝이 우린 홍차를 딱 한 모금 마신 뒤 내려놓고 가혹한 평가를 한 참이다.
"형편없군."
"…지금까지 내가 마셔본 건 티백뿐이야. 갑자기 찻잎을 우리라니 무리 아닌가."
"흥."
못마땅한 소리를 낸 뒤 싸구려 머그잔에 채워진 차를 마지못해 입술로 가져가는 꽃의 어깨 위에는 밝은 은백색 머리카락이 굽슬굽슬 늘어져 있었다. 브라우닝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얼떨떨할 뿐이었다. 시작은 로젠부르그 뒷골목에 새로 생긴 작은 가게에서였다.
* * *
뒷골목을 떠도는 풍문에 새로운 것이 하나 추가되었다. '재미있는 가게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운명을 점쳐 준다는 가게. 인적 없는 골목에 마지막까지 남는 장사꾼이란 점쟁이와 역술가이기 마련이기에, 새로운 점집이 문을 여는 것은 이 동네 사람들에게 전혀 흥밋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설에 오르내리는 가게라는 사실이 브라우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점술가가 아주 어린 소년이라고 했다. 게다가 운명을 점쳐 주는 방법이 꽤나 독특하다고. 과연 그랬다.
"미리 말해두지만, 어쭙잖은 물건을 팔아먹으려는 거라면 그만둬."
"가격은 복채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냥 가져가시면 됩니다."
"이런 수법도 흔하지. 그래, 뭘 끼워 팔 생각인가? 식물 영양제?"
"그런 건 가게에 있지도 않습니다. 아, 돌아가시는 길에 티숍에서 홍차 한 틴 정도 사 가시면 꽃이 좋아할 겁니다."
"…꽃이 좋아한다고?"
두꺼운 붉은 휘장을 젖히고 어둑한 방으로 들어서자 과연 젊은, 아니 거의 어리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점술가 소년이 웃으며 브라우닝을 맞이했다. 소년은 브라우닝이 앉자마자 카드를 셔플한 뒤 석 장을 엎어 놓고 한 장을 뒤집으라 권했다. 이렇게 간단한 스프레드로 뭘 점친다는 걸까 생각하며 시키는 대로 카드를 뒤집자,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에서 화분을 하나 들고 돌아왔다.
작지만 화려한 백장미가 피어 있는 화분이었다. 꽃술을 레이스처럼 몇 겹으로 감싸고 있는 흰 이파리가 화사했다. 조그만 붉은색 화분에는 은박으로 장식 무늬가 새겨져 있다. 브라우닝의 사무실에 놓으면 마치 훔쳐 온 물건처럼 보일 듯 어울리지 않는다. 가져가라는 말에 브라우닝은 몇 번이고 고사했지만, 소년 점술가가 던진 한 마디에 결국 그 화분을 받아 오고야 말았다.
"문제를 상담하러 오신 게 아니라 호기심을 충족시키러 오셨잖습니까? 가져가시면 아마, 당분간 재미있을 겁니다."
* * *
"골치가 아파질 거라고도 말해 줬어야지…."
생전 우려본 적 없는 홍차로 까탈을 놓을 거라고도. 키우는 방법에 대해 묻자, 점술가는 '꽃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만 대답해서 브라우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말이 맞았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자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있는 은발의 청년을 보고, 브라우닝은 이상한 일이지만 너무나 당연히 그가 협탁 위에 놓인 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누구냐고 묻자 화분 쪽을 눈짓해 보여 역시 그렇구나 생각했다. 늘 꿈꾸던 펄프 픽션은 아니지만, 환상 동화집 정도에는 나올 법한 일이었다.
루드, 라고 자신의 이름까지 먼저 밝혀 버린 꽃은 홍차와 허브 티밖에 마시지 않아 식비가 크게 지출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브라우닝이 집을 비우는 동안 루드는 자신의 화분에 알아서 물을 주곤 소파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곤 했다. 지루하지 않느냐고, 밖에 나가지 않겠느냐고 권해도 늘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멍청하긴. 난 꽃이야."
꽃 치고는 존재감이 지나치지만 말이지, 하고 브라우닝은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처음 소파에 앉아 있는 루드를 보았을 때, 손질이 잘 된 머리카락과 붉은색의 고급 코트를 보고 사실 더 높은 계층의 누군가에게 갔어야 하는 꽃이 아닌지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루드는 브라우닝의 싸구려 셔츠를 나눠 입고 담배냄새 밴 사무실의 낡아빠진 소파에서 잠드는 일에 신기하게 별 불평을 하지 않았다. 홍차를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굴었지만, 브라우닝이 멋도 모르고 아무 티숍에나 들어가 사온 장미꽃 향이 풀풀 나는 저렴한 가향차도 제대로만 우려 주면 싫은 소리 없이 마시곤 했다. 그 제대로 우리는 일이 썩 힘들었지만 말이다.
* * *
평화롭고 기묘한 동거 생활은 시작할 때처럼 갑작스레 끝났다. 아침 하늘이 유독 붉었던 날이다. 벌써 해가 질 무렵이었지만 브라우닝은 사무실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다리를 끌며 걷고 있었다. 잔뜩 얻어맞은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지나치게 높은 의뢰비를 제시하는 일은 일단 의심부터 해 보곤 하건만, 돌아가신 할머니의 하나뿐인 친구였던 늙은 고양이를 찾는다는 부탁에 그만 맡아 버리고 말았다. 의뢰인이 찾아달라던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가 아니었다. 값비싼 보석 장신구를 삼켜 버린, 그야말로 탐정 자신보다도 귀하신 몸이었다. 그 사실은 겨우 찾아낸 고양이를 추격하던 자들에게 뺏기고서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거짓말에 넘어가다니. 어쩐지 그 고양이, 사람 나이로는 환갑이 넘었다더니 도망치는 속도가 일품이더라…. 허탈하게 큭큭 웃다가 명치 아래쪽이 결려 벽에 기대었다. 그새 짙어진 그림자를 보며 브라우닝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마도의 밤은 위험하다. 이런 꼴로 길거리에서 맞이했다가는 다치거나 또는 죽고 말 텐데.
고개를 숙인 탐정의 그림자에 다른 그림자가 겹쳐, 브라우닝은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아픔에 몸을 웅크렸다. 웅크린 탐정의 팔을 익숙한 셔츠를 입은, 아직 익숙하지만은 않은 누군가가 잡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탐정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가…?"
"걸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감으로."
마도의 거리에 처음 나와보는 주제에, 감으로? 탐정은 헛웃음을 웃으며 자신을 찾아 집을 나선 꽃에게 매달렸다.
브라우닝의 안내에 따라 루드는 그를 부축해 탐정 사무실에서 조금 비껴간 방향으로 걸었다. 아무리 부축해서 걷는다 해도, 브라우닝의 걸음에 맞춰 탐정 사무실에 가려고 했다가는 중간에 해가 저물어 버리고 말 터였다. 멀지 않은 곳에 '약국'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약국이지만 브라우닝 같은 사람이 합법적이지 못한 일로 다쳐 왔을 때는 의사 역할까지 해줄 수 있는 '약사'가 있는 곳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겨우 약국에 도착해 약사의 손에 이끌려 뒷방으로 가 누웠다. 지독한 피곤이 몰려왔다. 기절하듯 잠에 떨어지면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루드의 심란한 듯 못마땅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브라우닝이 자고 일어나자 시간은 이미 새벽이었고, 루드는 온데간데없었다. 농담하지 말라며 웃는 탐정이 머리까지 다쳤는지 약사는 의심했다. 혼자 기듯이 들어와 쓰러져 잠든 양반이 자신과 함께 온 은발의 미인을 못 봤느냐고 물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니 곱게 피어 있던 흰 장미가 시들어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파리 끝이 검게 말라 있었다. 브라우닝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그동안 혹여 꽃이 상할까, 피우지 못했던 담배를 맛있게 한 대 피웠다.
바람에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벌써 아침인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서 옆에서 자고 있는 아치볼드를 바라보았다. 깨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제 자기 전까지 안 보이더니 야근을 마치고 새벽 늦게 들어온 건가, 싶어 일단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나는 그가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대로라면 늦게 일어난 나를 위해 그가 아침을 준비했겠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를 깨울 생각은 없었기에 잠시 단잠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간단히 토스트에 커피라도 준비해 볼까.
나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식빵 몇 조각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토스트기에 넣었다. 버터를 그릇에 덜어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동안 커피를 내렸다. 설탕을 넣으려다가 그가 단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너무 쓰다 싶으면 자신이 직접 넣어서 먹겠지.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스트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손을 데지 않도록 조심하며 토스트 두 개를 한 접시에 담은 후 적당히 녹은 버터를 꺼내 빵에 고르게 발라주었다. 어제 새로 사 본 잼도 꺼내놓을까 싶어 냉장고에서 딸기잼을 꺼내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버터 바른 토스트 두 개, 커피 두 잔, 딸기잼. 빠진 것이 있나? 그가 평소에 차려주던 아침을 떠올리며 천천히 식탁 위를 살폈다. 아차, 설탕을 빼먹었군. 급히 커피포트 옆에 놓인 각설탕을 두어 개 챙겨서 그의 커피잔 옆에 놔두었다. 더 빠진 것은 없겠지. 일단 외관상의 차이는 없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어버리고서 아치볼드를 깨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아치볼드, 아침일세. 일어나게나."
곤히 잠든 그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는 작게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살며시 떴다. 어린아이 같은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아치볼드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더니 나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이 몇 시인가, 브라우닝?"
그의 질문에 나의 시선이 방 한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그와 동거하게 되면서 내가 사왔던 시계. 나는 시계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치볼드에게 대답했다.
"8시 35분이네."
아치볼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침대 옆에 있던 모자를 썼다. 혹시나 했는데 오늘부터는 출근을 하는 건가? 당분간 휴가라고 말하더니 벌써 휴가가 끝인가. 고작 일주일 정도 쉰 게 휴가의 전부라니. 브라우닝은 아치볼드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회사원이라는 직업은 불편하군. 추리소설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브라우닝으로서는 회사원으로서의 생활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왜 적은 월급에 적은 휴가를 받아가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인지. 아치볼드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넥타이, 넥타이는 어디 있나? 다급하게 넥타이를 찾는 아치볼드를 보고 브라우닝은 한숨을 내쉬며 옷장 한 켠을 가리켰다. 그저께 빨래를 정리하면서 저곳에 넣어두었다. 자기 빨래는 좀 자기가 갤 것이지 꼭 나에게 부탁하고 나중에서야 찾는단 말야. 이미 몇 번이고 아치볼드에게 자신의 빨래는 자신이 정리하라고 말했건만 그는 항상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이래서야 내가 마치 가정부 같지 않은가. 브라우닝은 인상을 찌푸리며 미간을 짚었다. 아치볼드는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채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브라우닝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것을 눈치챈 그는 브라우닝에게 다가와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브라우닝의 손을 치우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브라우닝의 놀란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아치볼드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다녀오겠네."
당황한 채 입만 벙긋거리는 브라우닝을 내버려 둔 채 아치볼드는 급히 뛰쳐나갔다. 현관문이 닫히고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브라우닝은 긴장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항상 비슷한 패턴이다. 무언가 미안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가벼운 입맞춤이나 선물로 사과를 대신했다. 머리로는 그의 수법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매번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브라우닝은 한숨을 내쉬고서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라도 아침을 먹고 아치볼드의 몫을 정리해야 했다. 열 시쯤 워켄이 올 예정이었다. 아침 식사가 널브러져 있으면 한소리 할 것이 분명했다.
* * *
"어서 오게나."
워켄은 인사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손에 차트를 든 채 브라우닝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일하던 도중에 들린 것인가? 워켄은 저 차트를 상당히 자주 들고 왔지만 브라우닝은 저 차트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본 적이 없었다. 브라우닝은 차트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워켄이 말하지 않았기에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 브라우닝은 워켄을 소파로 안내한 뒤 부엌에서 차와 쿠키를 내왔다. 과자를 씹으며 워켄을 바라보던 브라우닝은 워켄이 갑작스레 말을 걸자 깜짝 놀랐다.
"오늘 하루는 좀 어땠나?"
워켄은 여전히 차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우닝은 먹던 과자가 목으로 넘어간 듯 두어 번 켁켁거리더니 워켄의 질문에 답했다.
"아침에 아치볼드가 늦잠을 잤다네. 오늘 휴가가 끝난다고 말한 주제에 여덟 시가 훌쩍 넘어서 일어나서는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더군."
"정신없었겠군."
"그래, 그에게 아침을 챙겨주고 출근길 배웅을 해주느라 나도 정신이 없었다네. 집안 꼴이 말이 아닌 것은 양해해 주게나."
워켄은 빙그레 웃는 브라우닝을 바라보고 시선을 차트로 옮겼다.
"다른 일은 없나?"
"글쎄… 아, 아치볼드가 어제 동물을 기르고 싶다고 하던데, 혹시 괜찮은 종을 아나?"
"잘 모르겠군. 동물에는 관심이 없어서."
워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자네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지. 브라우닝은 괜한 것을 물어보았다며 웃었다. 워켄은 잠깐 브라우닝을 바라보고서 차를 홀짝였다.
* * *
"이만 가보겠네."
"조심해서 가게나."
워켄은 코트를 여미며 브라우닝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워켄은 한숨을 내쉬었다. 브라우닝은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하고 있었다. 슬슬 눈을 뜰 때도 되었는데. 벌써 '그'가 죽은 지 한 달도 더 되었다. …중증이군. 워켄은 가볍게 혀를 차며 다음 환자를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탄약은 진득하게 몸에 튀었다.
안 그래도 없는 힘을 힘겹게 쏟아부어 날린 마지막 탄에도.
괜한 희망이었다.
괜한 삶이었다.
힘겹게 감기는 눈에 자신은 의식을 잃어갔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힘이 되는 일을 했더라면.
"정신이 드신 것 같네요오오…"
필름처럼 끊겨버린 정신에 아, 난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라고 진작 판단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온몸에는 붕대투성이. 게다가 온갖 통증이 느껴져 말을 꺼낼 수 없던 상황이었다.
아까 여자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가라앉은 눈을 손으로 비비고 푹신한 침대에 앉아보니 이제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그녀라기보다는 너무 어린 아가씨였지만. 몇 초 동안 멍하게 쳐다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
"아, 힘겹게 말 안 하셔도 되요오…"
목은 쉰 나머지 쇳소리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것을 알아챈 꼬마 아가씨는 놀란 듯이 다가오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무리 봐도 초면이었다. 푸른색의 메이드같은 복장은 정말 익숙지가 않았다. 자신이 워낙에 의뢰비만 쭉쭉 빨아먹고 사는 덕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이렇게 치료해주는 여자는 처음 봤다 해서 멍하게 쳐다보았다.
처음에 그녀는 부담스러운 듯 잠시 눈치를 보다가 붕대를 풀어주었다.
"…윽…"
"괘…괜찮으신 것 맞으시죠…?"
놀란 듯이 그녀는 안절부절의 상태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으니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때는 분명 밤이었는데 지금 창문 밖은 노을이 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루를 기절하다시피 보냈구나. 한숨을 쉬고선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작은 손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힘들게 붕대로 감았다. 힘들지 않을까.
"제가…싫으신가요…?"
"그건 아니지만…"
겨우 쉰 소리로 말을 하고서 운을 떼니까 그녀는 궁금한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신, 곧 데이빗 브라우닝은 계속 무언가를 생각했지만 결국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 탐정인데도 그녀의 신상 착의조차 몰랐던 걸로 보아 그녀는 마도 로젠부르그 사람이 아니다. 라는 정도만 눈치를 챘다.
음…만 계속 말하다 보니 그녀는 질렸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약병에 흰색의 무언가가 찰랑거렸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아무래도 느낌으로 보아 '우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정적이 흐르는 상황에서 마실 필요는 없었다.
"…후, 더 필요한 것 없으시나요?"
눈에는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 존재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허리에도 안 올 꼬마 아가씨가 금세 커져 버려, 아니 타임머신처럼 20대처럼 보이는 아가씨가 되어 자신의 허리 ― 허리 쪽의 붕대 ― 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버버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귀엽다고 말하고선 볼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미소 지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자신이 단지 아까 자신처럼의 꼬마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는 눈빛.
"다른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자네는 누구인 건가…?"
창백하게 마른 오른 손목에 무언가를 주사한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단지, 단지 어젯밤처럼 눈앞이 흐려질 뿐이었…다….
"단지 수면제를 주사한 것뿐이니,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저의 이름은…… 네……"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선택한다.
에우리피데스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은하계 변두리의 고유명사조차 없이 코드명으로 불리는 식민위성에서 태어난 것도, 유전자 결함으로 지니게 된 능력도, 부모님의 사고도, 탐정이 된 것도, 심지어 로젠부르크에 정착한 일조차도 어느 하나 자신이 선택하여 결정한 결과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브라우닝은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좀 현명하지 못하면 어때서. 필사적으로 추구할 원대한 야망도, 아득바득 기를 써서 성취할 목표도 없다. 제 한 몸 편히 누일 소파와 향긋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정도는 다른 탐정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을 하찮은 의뢰를 설렁설렁 해치워 버는 푼돈으로 충분했다. 양지바른 공터에서 께느른하게 낮잠을 즐기는 늙은 길고양이처럼 나태하고 무의미한 삶. 브라우닝은 그런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며 마도 로젠부르크 10계층의 탁한 구정물 속에서 길고 가늘게 호흡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게, 대체…"
브라우닝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심지어 비벼 보기도 했다. 조작법을 알았다면 메인 디스플레이를 껐다 켠다던가 서브 디스플레이에 뜬 데이터를 다시 검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뭘 해도 눈에 보이는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우주선의 조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빌어먹을.]
등 뒤의 통신 스크린에서, 프라임원의 언더보스가 내뱉은 욕설이 몇십 광년을 격하여 들려왔다. 브라우닝이 본 것을 그도 보았다는 의미였다.
서브 디스플레이어가 띄운 데이터에 따르면, 지금 데비안트 호가 다다른 좌표에는 몇백만 년 동안 착실하게 수축하며 항성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원시성이 있 ― 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메인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것은 무수한 무기질의 파편뿐이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그 어린 별을 움켜쥐고 부서뜨린 다음 멋대로 휘저어 이쪽에는 소용돌이를 그리고 저쪽에 호선과 직선을 긋던 끝에 어설픈 것인지 고의적으로 뒤튼 것인지 알 수 없는 점묘화를 만들다 만 것 같은, 천문학도 물리학도 양자역학도 상식도 이성도 비겁한 자기보호본능마저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맙소사."
원격으로 조종되는 브릿지의 함장석 끄트머리에 어설프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브라우닝은 하마터면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별을 살해한 손은 잠시 쉬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마치 데비안트 호를 환영하기라도 하듯 물결치는 흐름이 이쪽 파편을 밀어내고 저쪽 파편을 긁어온다. 잠시 그 거대한 손짓을 멍하니 바라보던 브라우닝이 입술을 깨물어 욕설인지 비명인지 노호怒號인지 모를 격한 숨을 되삼켰고,
[오타는 애교라 이건가? 제법 재치가 넘치는 악마님이군.]
코브가 안도의 한숨을 얼버무리듯 비아냥거렸다. 농담을 할 여유를 찾은 것을 보면, 드디어 이블린이 지독하게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두통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 가엾은 어린 마녀에게 암흑공간의 침묵이 영원히 함께하기를. 입술을 짓깨물어 피를 보기 전에, 브라우닝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격렬한 적의도, 쓰디쓴 패배감도, 에일 듯한 좌절감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가장 낮은 시궁창의 구정물처럼 고여 썩어가는 인생에는 그런 화려한 감정이 불탈 여지가 없었다.
"이블린은 어떤가?"
[잠들었다. 평안해 보여. 정말 그 악마 때문이었나.]
"음…"
브라우닝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 악마 때문이라네. 나한테 필요도 없는 선물을 잔뜩 안겨 주고, 소중한 사람은 생기는 족족 빼앗아 가고, 저 좋을대로 내 삶을 휘저어 놓는 변태 바이올리니스트 때문이지.
그리고,
―미안해요, 브라우닝. 내가 석류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발푸르기스에서 춤을 추는 바람에, 그 악마의 바이올린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미안해요, 브라우닝, 나 때문에, 당신이, 그 악마가, 당신을 찾아내서, 당신을…
피를 토할 것처럼, 발작하듯 흐느끼며 내게 사죄하던 자네의 작은 마녀 때문이라네. 나는 한 번도 현명하거나 부유하거나 유능하거나 위대하기를 바란 적이 없었어. 그저 없는 듯 숨죽여 살다가 없었던 듯 사라지고 싶었어. 저 변덕스러운 악마의 총애를 받는 삶을 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비겁하고 치사할 수 있었지.
자네의 작은 마녀가 울지만 않았어도.
"가야겠군. 여기까지 태워줘서 고맙네, 코브. 데비안트 호가 무사히 돌아가면 좋겠군."
[원격조작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그보다 돌아올 때는 어쩔 건데?]
"글쎄."
돌아가게 해줄까? 그 악마가. 브라우닝은 웃었다.
D, A, V, i, d, B, R, o, W, n, n, i, g.
죽음의 선율을 연주하는 악마가, 자신이 살해한 별의 시체로 짜맞춘 어설픈 현수막 앞에서.
"그동안 신세 졌네, 코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자, 자, 감동적인 이별은 거기까지. 깜빡, 깜빡. 브릿지의 조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브라우닝의 이름을 부르던 통신 스크린이 꺼졌다. 존재했고 존재할 리 없는 데이터를 토해내던 서브 디스플레이가 꺼졌다. 단두대에 목이 잘린 귀족으로 만든 마리오네트처럼 수욕受辱의 춤을 추기 시작하는 별의 사체를 비추던 메인 디스플레이가 꺼졌다. 한 줌 미지근한 공기를 품은 금속상자에 갇힌 채 공기도 온도도 중력도 빛도 소리도 없는 암흑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브라우닝이,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큼 오래 살았으면서 내 이름 스펠링도 틀리는 거냐. 내가 다 부끄럽다."
"내가 어릴 때는 습자習字 수업이 없었거든."
카렌베르크의 손가락은 대리석으로 깎은 천사의 그것처럼 희고, 아름답고, 차가웠다. 그 손가락은 아무리 오래 져지를 연주해도, 방금 끓인 찻잔을 쥐어도, 브라우닝이 턱이 아플 정도로 머금어도, 뻣뻣한 몸이 녹아내리며 비명을 지를 때까지 브라우닝의 안을 유린해도 결코 데워진 적이 없었다. 그 선뜩한 열 개의 손끝이 브라우닝의 목덜미를 지판指板처럼 짚고,
"드디어 돌아왔구나. 어서와, 데이비."
"…죽어버려라, 망할 악마야."
후후후― 유쾌한 악마의 웃음소리를 도입부로 죽은 별에게 바치는 진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즉흥적으로, 현란하게, 한 박자 쉬고, 단조를 장조로 바꾸어, 춤추듯 발랄한 당김음을 건너뛰어, 죽어가는 탐정에게 바치는 광시곡이 데비안트 호도, 별의 시체도, 빛도, 체온도, 소리도, 카렌베르크와 브라우닝이 아닌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수인 브라우닝 설정, 라쿤 너구리 기준으로 0개월에서 12개월까지 성장하며 1년이 넘으면 성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설정입니다. 소설 내에서의 브라우닝은 현재 3개월 된 새끼 너구리입니다.
얼다 만 비가 자박자박 내리는 아침이었다. 얼음 알갱이가 알알이 맺힌 물방울들은 창문에 제 몸을 비볐다. 브라우닝은 머리 위로 둥글게 솟은 귀를 펄럭이며 이불을 등에 업고 나왔다. 얇은 푸른색 담요에 볼을 비비며 창문을 열자 차가운 빗방울들이 브라우닝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시원하다 못해 약간 서늘하기까지 한 아침 바람이 기분 좋았는지 브라우닝은 입을 벌리고 팔을 휘둘렀다.
바람에 커튼이 펄럭였다. 벌써 창문 근처의 거실 바닥은 물에 젖어 눅눅했다. 브라우닝의 발이 닿는 곳곳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브라우닝은 엉덩이 위로 북슬북슬 흔들리는 꼬리를 끌어안은 채 소파 위를 뒹굴었다. 브라우닝의 몸에 묻어 있던 물방울들이 가죽 소파 위에 맺혔다. 갸릉갸릉. 목 울리는 소리까지 내며 브라우닝은 늘어지게 하품했다. 점차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하고 브라우닝은 꼬리를 꼭 끌어안은 채 다시 잠을 청했다.
"브라우닝!"
브라우닝은 잠에서 번쩍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긴장한 귀가 높게 올라가 쫑긋거렸다.
화가 난 듯 무서운 표정을 지은 루드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브라우닝을 내려다보았다. 브라우닝은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빗물이 들어오고 있어 거실의 절반은 물에 퐁당 빠진 것 마냥 눅눅했다. 브라우닝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불안감에 턱을 안쪽으로 당겼다. 브라우닝은 꼬리를 끌어안고 놀란 귀를 반으로 접었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꼬리 끝을 우물거리는 브라우닝의 모습에 루드는 한숨을 푹 쉬고 손뼉을 쳤다. 루드의 손뼉소리에 놀란 듯 브라우닝은 숨을 "합."하고 들이마셨다.
"무슨 일이 있었지, 브라우닝. 어서 설명해봐."
"비가 왔네. 그래서 문을 열고 놀다가, 잠들어 버렸네."
아직 어눌한 말씨와 앳된 목소리로 느리지만 대답하려는 브라우닝을 보며 루드는 조금 화가 풀린 듯 팔을 풀고 브라우닝의 뺨을 잡았다. 말랑거리는 볼에서 아기 분 냄새가 났다.
"앞으로 문단속은 잘하도록 해."
"알겠네."
브라우닝은 느리게 귀를 세우며 씹고 있던 털을 푸 하고 뱉었다. 혓바닥에 얼기설기 엉킨 털들이 퉤퉤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은 브라우닝은 호기심이 많았다. 그 때문에 고생하는 건 오롯이 루드의 몫이었다. 이전에는 장판을 죄다 갉고 물어뜯은 적이 있었다. 손톱이 간지러운지 벽지를 벅벅 긁어낸 적도 있었다. 루드가 아끼던 붉은색 커튼도 끝자락을 다 찢어 놓은 적도 있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이라는 닥터의 말에 루드는 브라우닝한테 화 한 번 제대로 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보다 루드는 브라우닝의 갈색 눈동자가 커지면서 물기를 잔뜩 머금은 표정을 보고 있노라 하면 화가 사르르 녹아내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 먹자, 브라우닝."
"아침!"
꼬리털을 정돈하던 브라우닝이 입을 바아 벌리고 총총걸음으로 루드에게 다가갔다. 깨끗하게 씻은 사과 하나를 브라우닝의 손에 올려주자 브라우닝은 또 화장실로 달려가 수도꼭지를 돌렸다.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에 사과를 대며 돌돌 굴리는 브라우닝의 모습에 루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루드, 사과에 바람이 들었네."
"그런가. 샐러드로 해 먹어야겠는걸."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브라우닝이 발을 굴렀다. "사과에 바람이 들었단 말이네."라며 툴툴거리는 브라우닝을 보며 루드는 다음번엔 사과가 아닌 다른 과일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루드, 오늘 닥터는 안 오는 겐가."
"곧 오시겠지. 벌써 13번째 묻고 있어, 브라우닝."
"하지만 얼른 닥터가 보고 싶단 말일세."
브라우닝이 꼬리 끝을 씹으며 발끝을 꼬물거렸다. 루드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브라우닝을 안아 들었다.
"그렇게 닥터가 보고 싶어?"
"응. 오늘은 닥터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네."
나한테는 보여주기 싫다는 건가.
루드는 바짝 굳은 볼 근육을 간신히 끌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제 품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 브라우닝의 등을 토닥였다. 이 나이에 질투라니, 메렌이 보면 비웃을 일이었다. 루드는 브라우닝의 머리에 뺨을 대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브라우닝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루드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옷깃을 꽉 잡았다. 루드는 브라우닝을 감싸듯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밖으로 나서자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루드는 장우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둘을 반기듯 우산 위를 통통 튀었다. 꼬물거리던 브라우닝이 모자를 꾹 눌러쓰고 귀를 가렸다. 빗방울들이 바람에 맞춰 날아와 브라우닝의 콧등에서 미끄럼을 탔다. 시원함에 브라우닝은 또 희미하게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간지러워, 브라우닝. 얌전히 있어야지."
"미안하네."
브라우닝은 꼬리를 다시 말며 목도리를 단단히 했다. 샛노란 목도리가 길게 늘어져 나풀거렸다. 루드는 고개를 내밀고 있는 브라우닝의 머리를 꾹 누르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침부터 계속 내리던 비는 이제 조금은 얼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삼십여 분을 걸어서 도착한 조그마한 병원에 루드는 문을 딸랑이며 들어섰다.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워켄이 고개를 돌려 루드를 바라보았다. 브라우닝이 몸을 비비며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닥터!"
그제야 뭉뚝한 표정을 짓던 워켄은 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루드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너무하다는 듯 툴툴거렸다. 루드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브라우닝은 귀를 쫑긋거리며 워켄에게 다가갔다. 워켄은 뛰어오는 브라우닝을 안아 들고 뺨을 비볐다.
"보고 싶었네, 닥터!"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단다."
워켄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브라우닝은 날갯짓하듯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고는 워켄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갛게 웃었다. 장밋빛으로 물들어가는 브라우닝의 얼굴에 워켄은 눈 끝을 접고 웃어주었다. 루드는 한 걸음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둘의 애정행각을 바라보았다. 워켄은 브라우닝을 안아 든 채 루드를 향해 턱을 당겼다. 루드는 이맛살을 구기고 워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워켄에게 안긴 채, 짤막한 팔을 휘두르며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브라우닝의 모습에 루드는 바스스 올라가는 입꼬리를 힘주어 눌렀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방 안이었다. 작은 방은 아득했다. 닥터가 쉬는 곳인가 보군. 루드는 외투를 벗어다 소파 등에 올려두었다. 털썩 소리를 내며 소파에 앉자 브라우닝이 루드의 허벅지에 달려들었다. 바작바작, 부스스한 머리카락들이 서로 부대끼며 간질였다. 톡톡, 루드는 손가락으로 브라우닝의 관자놀이를 두들겨 주었다.
"밥은 먹었니?"
워켄이 마들렌과 홍차를 내오며 브라우닝에게 물었다. 루드에게 제 몸을 비비며 꼬리털을 핥아대던 브라우닝이 머그컵을 조심히 들어 모락모락 올라오는 새하얀 김을 "푸후." 불었다.
"응, 먹었네. 바람 든 사과였네."
"저런. 루드, 잘 챙겨줬어야지."
워켄은 다리를 휙 꼬고 찻잔을 들었다. 루드도 이마를 구기며 옆에서 호록호록 차를 마시는 브라우닝을 따라 컵을 입술에 댔다. 습한 밖과는 달리 조금 건조하기까지 한 방 안이 조금 불편했다. 컵의 윗부분이 닿은 입술이 따뜻했다.
* * *
브라우닝이 워켄의 품에 안겨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루드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애꿎은 약병만 들었다 놓았다 손장난을 반복했다. 달그락 달그락. 플라스틱 약병이 움직일 때마다 시끄럽게 몸을 떨었다.
"와아."하는 감탄사가 터졌다. 궁금해진 루드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워켄에게 종이를 펼쳐 보이는 브라우닝과 그 종이를 보고 대견하다는 듯 브라우닝의 뺨에 제 뺨을 비비는 워켄이 보였다. 후우. 루드는 한숨을 훅 뱉고 고개를 저었다.
비가 어느 정도 그쳤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닥터."
"아 그래."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 루드는 붉어져 있을 제 얼굴을 감싸고 방문을 쾅 닫았다.
"…루드, 화난 겐가?"
"설마."
워켄과 브라우닝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 다시 루드가 나간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 * *
밖으로 나간 루드는 이러하다 할 장소 하나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걸었다. 여전히 비가 어깨를 적시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은 듯 목도리에 턱을 묻고 좁은 보폭으로 걸었다. 와플 가게를 지나 과일 가게 근처에 다다르자 붉은색으로 빛나 만질거리는 자두들이 눈에 밟혔다. 그 앞에 멈춰서 자두를 보고 있으니 브라우닝이 생각났다.
주책이군.
부모 마음이 이런 걸까. 루드는 결국 자두 다섯 알을 샀다.
* * *
"다녀왔어."
"쉬잇. 일찍 왔군."
색색이며 곤히 잠든 브라우닝의 등을 두들기며 워켄이 루드를 반겼다. 루드는 검은 봉투를 내리며 브라우닝을 되받았다. 자리가 옮겨지자 "웅." 목을 울리곤 뒤척이는 브라우닝을 보고 루드는 피식 웃었다. 워켄이 자두 하나를 꺼내 들고 이리저리 살피다 아직도 자두가 나오나. 라며 의아해했다.
소파에 브라우닝을 뉘이고 루드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래서, 나 몰래 둘이 뭘 그렇게 즐겁게 본거지?"
"그게 그렇게도 궁금했나."
워켄이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비뚜름한 선으로 그려진 세 사람은 자신들이었다. 루드는 눈꼬리를 누그러트리고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림 속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아이는 귀도 있었고 꼬리도 있는 브라우닝이었다. 또 그 둘 옆에서 눈웃음을 짓고 있는 그림은 누가 봐도 워켄이었다. 브라우닝은 워켄 옆에 'Doctor'이라는 영어도 적어놓았다.
이걸 보여주겠다고 그렇게 기다렸군, 루드는 조금 브라우닝이 괘씸하게까지 느껴졌다. 누구는 하루 종일 질투 나서 안절부절못했는데, 누구는 이렇게 곤히 자고 있다니. 워켄이 종이를 뺏어다 벽면에 붙였다.
"일하는 사람한테 이런 거 하나는 양보해주겠지, 루드."
워켄이 웃음기를 띈 목소리로 루드에게 물었다. 루드는 브라우닝을 안아 들고 외투 속으로 다시 브라우닝을 감쌌다. 그러고는 두 발자국 워켄에게 다가가 미소를 걸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단호하게 루드는 종이를 휙 가져갔다. 너무하는군, 이라는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루드는 워켄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그만 가라는 듯, 워켄도 손을 휘휘 저었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우산을 접고 집으로 향하는 루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합작에 참여해 주신 일곱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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